의정부법무법인 [책과 삶]유럽보다 빛났다, ‘교역의 시대’ 동남아시아
작성자행복인
- 등록일 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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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언어와 문화가 매우 다양해 하나로 묶기가 쉽지 않다. 번역자인 박소현 번역가에 따르면,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동남아시아를 하나의 지역으로 묶어보려는 시도조차 미미한 상황에서 저자는 ‘닥치는 대로’ 사료를 읽고 연결점을 찾아내 가능할 법한 더 큰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방법을 택했다”.
저자가 복잡다기한 동남아시아사를 관통하기 위해 찾아낸 주제는 ‘교역’이다. 저자는 “천혜의 물길을 통해 교역으로 연결되고 국제 교역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는 역동적인 세계”였던 15~17세기 동남아시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거대 시장인 중국과 인도, 중동과 유럽을 잇는 해상 무역로에 자리 잡은 동남아시아의 교역은 ‘바람’을 타고 이뤄졌다. 인도양의 계절풍이 뱃길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줬다. 계절풍을 타고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바람 아래의 땅’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리적 위치 때문에 동남아시아는 로마 시대와 중국 한나라 시대부터 교역이 발달했으나 15~17세기 사이에는 교역의 비중이 특히 커졌다. 후추, 정향, 육두구 등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향료들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1620년대 유럽 국가들이 연간 사들인 향료는 정향 300t, 육두구 200t, 메이스 80t에 달했다. 17세기 포르투갈,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페인은 교역 과정에서 식민지 아메리카의 은을 대량으로 동남아시아로 가져왔는데, 대량의 은 유입은 동남아시아에서 도시를 성장시키는 동력이 됐다.
16~17세기 동남아시아 주요 도시 인구는 당시 서유럽 주요 도시보다 인구가 많았다. 저자의 추정에 따르면 16세기 아유타야는 26만명, 브루나이는 16만2000명으로 추정되는데, 비슷한 시기 런던(10만명)보다 많은 규모다. 17세기 중반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탕롱, 아유타야, 마타람의 인구는 15만~20만명으로 추정된다. 아체, 마카사르, 반튼, 낌롱 등은 17세기 중반 약 10만명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중반 동남아시아의 대도시 거주자 비율은 5%로, 인도 무굴제국이나 중국보다는 낮았지만 당시 서유럽보다는 높았다.
여성이 사회생활에서 타 문화권에 비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폴리네시아, 마다가스카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을 포함하는 오스트로네시아 사회에서는 여왕이 드물지 않았다. 14세기에 건국된 인도네시아 보네 왕국은 역대 서른두 명의 왕 중 여섯 명이 여왕이었다. 특히 교역이 꽃을 피웠던 15~17세기 동남아시아에서는 여성이 왕좌에 오른 사례가 많았다. 현재 태국에 속하는 파타니에서는 100년 이상, 수마트라섬 북부 아체에서는 58년간 여왕들이 연속해서 통치했다. 여성들은 상인으로 활동한 것은 물론이고 외국과 협상을 위한 특사로도 활약했다. 수마트라나 필리핀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문해력이 뛰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저자는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이 교역에 친화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남성은 높은 지위 의식과 전장에서의 명예를 지킬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재산을 낭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시장을 움직이는 힘을 이해하고 면밀하게 협상하며 자본을 지키는 것은 여성의 일이었다. 대체로 여성 통치자에 대한 이러한 기대는 배반당하지 않았다.”
번영했던 동남아시아는 17세기를 거치며 쇠락했다. 1621년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전쟁, 서유럽을 덮친 흉작으로 유럽 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은 생산량이 급감했다. 중국의 동남아시아 무역도 중국의 정치적 혼란으로 침체에 빠졌다. 활황기에 교역의 중심지였던 동남아시아의 상품 수출은 급감했다. 여기에 1690년경 소빙하기가 찾아와 전 세계적 농산물 작황이 타격을 받았다. 이 와중에도 향료 무역을 독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최고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동남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은 “비통하게 침체된 오지”로 전락했다.
저자는 유럽과의 군사충돌에서 패배한 것이 동남아시아가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실패한 결정적 이유라고 본다. 유럽인들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군사력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동남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은 바다를 낀 항구들이어서 유럽 선박들의 해상 포격에 취약했다. 반면 당시 동남아시아의 전쟁 역량으로는 유럽인들의 요새를 공략할 수 없었다.
동남아시아가 15~17세기 전성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동남아시아가 19세기와 20세기 식민주의의 그늘을 털어버리고 교역의 시대에 누렸던 번영의 기억을 디딤돌 삼아 미래를 열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직전의 과거는 정치적 혼란과 분열, 사회적 불평등과 계층화, 외세의 경제적 지배에 대한 체념의 기억으로 가득하지만, 그보다 앞선 시대는 급속한 경제적 변화에 맞선 다채롭고 창조적인 대응, 다종의 사회 형태, 다양한 정치적·지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국소비자원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는 경기도 시흥시 신축 아파트 신천역에피트의 주방 시스템 에어컨과 관련해 집단분쟁조정 절차를 개시한다고 25일 밝혔다.
시행사인 ㈜다우개발과 시공사인 에이치엘디앤아이한라㈜가 분쟁조정의 당사자다. 해당 아파트는 총 1297세대 규모로 오는 30일 입주를 앞두고 있다.
이번 분쟁은 이 아파트 111㎡ 타입을 분양받거나 전매 계약으로 양수한 소비자들이 주방 시스템 에어컨 설치 위치와 송풍구 방향이 계약 과정에서 받은 안내문과 다르게 시공됐다며 불만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소비자들은 냉방 성능 저하 등 시공 변경으로 발생한 피해를 배상하거나 재시공해달라고 요구하며 지난 7월 위원회에 집단분쟁조정을 신청했다.
위원회는 심의를 거쳐 계약과 다른 시공으로 인해 피해를 본 소비자 수가 50명 이상이고, 사건의 중요한 쟁점이 사실상 또는 법률상 같다고 판단해 집단분쟁 절차 개시를 결정했다.
개시 공고는 다음달 14일까지 한국소비자원 홈페이지 및 일간신문에 게시된다. 같은 피해를 본 소비자들은 공고 기간 동안 집단분쟁조정에 참가할 수 있다.
직장인 A씨는 “매일 정동길을 오가는데 이곳에 박물관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점심 무렵 A씨와 함께 서울 중구 ‘이화박물관’을 찾은 직장동료 B씨도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우연히 따라 들어왔는데 여기에 유관순 열사의 ‘명예 졸업장’과 과거 기록물이 있는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박물관 옆에 유관순 열사가 빨래를 하던 우물터가 있는 것을 아느냐’고 묻자 이들은 “아직도 그런 것이 남아있느냐”며 놀라기도 했다.
매일 많은 시민들이 정동길을 오간다. 하지만 이곳에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기록한 이화 박물관과 유 열사가 독립운동 전 마지막 학창시절을 보낸 이화학당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9월 28일은 유 열사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8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숨진 지 105주년이 되는 날이다. 고인의 유해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일제가 군용기지확장 명목으로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골을 분실해 현재는 행방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그의 마지막 흔적들은 유 열사가 독립운동을 도모했던 충남 천안에도 있지만, 이곳 이화여고 안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과거 ‘이화학당’이었던 이화여고 교정에는 그가 학우와 교사들을 위해 밤마다 빨래를 했던 우물과 기숙사 터가 있다.
유 열사는 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사촌언니와 함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 교비생(장학생)으로 편입한 뒤 1919년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했다. 그는 3·1운동으로 휴교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약 2년여간 이곳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유 열사가 살아생전 마지막 학창시절을 보낸 곳인 셈이다.
이화여고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고 이희호 여사의 주도하에 지난 1974년 3월 유관순 기념관도 준공했다. 하지만 약 5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유관순 기념관도 함께 낡았다.
이날 찾은 유관순 기념관은 50년 넘은 세월 탓에 건물 벽면과 기둥마다 균열이 선명하게 보였다. 누수로 인한 녹물 얼룩도 벽면과 천정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곰팡이 냄새도 났다.
25일 학교 관계자는 “이화기념관은 현재 구조적으로 안전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 최소한으로만 활용하고 있다”며 “유관순 열사의 뜻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화기념관을 학교복합시설로 재건축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관순 기념관은 이화여고 내 시설이라는 이유로 서울시나 시교육청의 지원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통상 교내에 학교복합시설을 설치할 경우 교육청으로부터 공사비 등 관련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화여고를 비롯한 자율형 사립학교(자사고)는 국공립학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원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학교 관계자는 “유관순 기념관을 학교복합시설로 만들어 더 많은 시민들에게 유 열사의 업적과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학교의 의지는 변함없다”며 “현재 많은 동문들이 십시일반으로 공사비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