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 史淵]40대 기수론의 가치와 오염
작성자행복인
- 등록일 2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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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30~40대 정치인이 등장해 정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막힌 곳을 뚫는 사례는 외국에도 종종 있는 일이다. 특히 30~40대가 국가 원수로 취임하는 뉴스는 요즈음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등장을 우리처럼 40대 기수론, 30대 기수론이란 말로 포장한 뉴스를 필자는 접한 적이 없다. 대부분 안정된 정당 체제를 바탕으로 신구(新舊)가 조화롭게 작동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선택이어서다. 우리처럼 반독재 민주화를 향한 저항과 세대교체라는 격렬한 선택의 연속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짝을 이룬 세대교체론과 40대 대망론
40대 기수라는 깃발을 처음 든 사람은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였다. 그는 1969년 11월8일 “우리는 지금 분명히 위장된 민주주의하에 살고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성명을 발표하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서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는 다가오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의 박정희를 상대하는 도전자가 되어, 정보정치와 부정선거에 의존하는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종지부를 찍고, “국민 염원인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세워” 4·19정신에 입각한 “순수한 민간정부”를 반드시 재건하겠다고 출마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도전이 “위장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민주주의”이고, “관권에 대한 민권”이며, ‘가진 자에 대한 잃은 자의 도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김영삼 회고록 1>).
김영삼의 선언은 전격적이고 돌출적이었다. 당 총재만 미리 알았을 뿐, 그가 속한 파벌의 리더를 포함해 누구도 사전에 몰랐을 정도였다. 위계가 분명한 야당에서 40세에 불과한 사람이 그렇게 선언하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김영삼의 입장에서 선언 행위 자체가 정치생명을 건 용기와 도전이었다. 그를 ‘반전의 승부사’라 평가하는 시선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당내 반응이 독특했다. 주류와 비주류를 불문하고 파벌의 리더들 모두가 그의 전격 선언을 매우 못마땅해했다. 당 원로들은 하나같이 물러날 뜻이 전혀 없음을 침묵으로 대변했다. 그러면서 나이로 세대를 구분하지 말아야 하고 ‘젊은 늙은이’보다 ‘늙은 젊은이’가 문제라며 생리적 교체 대신 정신적 교체를 내세웠다. 반면에 각 파벌의 중간급이나 청년 당원은 김영삼의 제창에 호응했다. 이들은 세대교체를 통해 국민에게 매력 있는 40대 후보를 내세워 무기력에 빠진 당의 체질을 개선하고 1971년 대선에서 승리하기를 바랐다. ‘파벌의 전국(戰國)’에 빠져 있던 신민당에서 노장 대 소장, 달리 말하면 세대 간 입장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김영삼의 선언은 당내 일부 여론을 반영한 파격이었다. 사실 신민당 등 야당은 5·16 쿠데타 세력에게 두 차례씩 있었던 총선과 대선에서 모두 패배했다. 김영삼의 선언 3주 전인 1969년 10월1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도 완패했다. 박정희의 3선을 보장하는 개헌을 저지하지 못한 것이다.
이즈음부터 당내에서는 세대교체론과 40대 대망론이라 불리는 여론이 급속히 형성됐다. 김영삼은 두 여론을 공론장으로 끌어낸 것이다. 당 안팎의 또 다른 상황이 두 여론을 뒷받침했다. 당내에서는, 유진오 총재의 와병으로 당이 표류 상태인 데다 대통령 후보를 추대보다 자유경쟁으로 선출할 여지가 있어 보였다. 당 밖을 보면, 능률과 행동력이 중요한 속도 경쟁에서 공화당에 뒤처진 현실을 만회하고 유권자의 상황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 근거로 공화당 상층의 평균 연령이 51세인 데 비해 신민당의 상층은 59세 정도였고, 유권자는 35세까지가 전체의 45%, 49세까지가 전체의 85%라는 통계가 제시됐다. 그래서 소장층은 만약 야당의 40대 지도자가 1971년 대선에 출마하면 54세인 박정희보다 젊고 활발해 국민 감각과 일치하는 데 유리하다고 보았다.
이렇듯 40대 대망론은 출발부터 당 내외를 상대하는 ‘대항마’ 담론이었다. 하지만 대망론보다 더 능동적이고 중심성을 드러내는 40대 기수론이란 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김영삼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그 말은 1970년에 들어서자마자 호명되기 시작했다.
40대 기수론의 진정한 가치
40대 대망론은 특정 개인의 사적 욕망을 앞세운 주장이 아니었다. 국민과 함께 박정희와 공화당의 장기집권을 막기 위한 세대교체론과 짝을 이루어 작동한 여론이었다. 40대 대망론의 당사자로 지목받고 있던 김대중과 이철승이 1970년 들어 후보 지명전에 뛰어들자, 당내의 어느 사람도 두 여론을 그냥 방치하자고 말할 수 없게 됐다.
김대중은 ‘40대 기수론’이란 칼럼에서 40대가 등장해야 하는 이유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그는 “혁명적 투쟁을 방불케 하는 사생결단을 통해서만” 한국에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하며, 전체 인구의 80% 이상인 40세 이하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미국의 물결 속에서 자랐으므로 노장층과 ‘단절의 벽’이 있다고 보았다. 또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30대 후반 또는 40대가 지도층을 ‘점령’했는데 신민당만은 노장 인사들이 지배해 왔으며, 3선 개헌에 충격을 받은 국민이 새로운 지도력을 요구하고 있음을 내세웠다. 마지막으로 ‘민주 조국의 운명을 회생시키려면 아직도 강력하고 노쇠하지 않은 50대의 박정희보다 더 힘차고 젊은 40대 후보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국제신보 1970년 1월27일).
40대 기수론을 전면에 내세우고 후보 지명전에 뛰어든 세 사람은 당 조직의 체질을 개선하고 새로운 작풍을 조성하려는 다음 두 가지 방안도 지지했다. 하나는, 야당의 전통적 조직 운영방식을 탈피해 총재와 후보자를 분리하자는 방안이었다. 이렇게 하면 40대 대권 후보자와 60대 당수(黨首)로 분리해 신구 조화를 이루면서도 당의 체질까지 개선할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달리 보면, 그때까지 야당 지도자에게 요구되던 항일, 반공, 반독재 투쟁이란 경력 요건 가운데 항일투쟁 요건이 처음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후보자를 협상으로 지명하거나 추대하기보다 전당대회에서의 실력 대결, 곧 투표로 선출하는 방안이었다. 이렇게 하면 신민당의 전통적 생리에 도전해 권위주의 리더십을 부정하고 새로운 당내 민주주의를 확립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당 조직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원만하게 진행됐다는 뜻은 아니다. 유진오에 이어 당권을 쥔 유진산 대표위원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는 3월10일 기자회견에서 40대 기수론을 “정치적 미성년자들의 행위”라고 강경하게 비난했다. 그래도 여론에 밀리자 40대 기수론의 대상자인 세 사람에게 후보 지명권을 자신한테 위임하라고 직접 요구했다. 이에 김대중은 유진산에게 전화를 걸어 의사를 확인하던 도중 본인이 출마하려는 요구임을 확인하고 이 요구를 거부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 결국 1970년 9월 신민당 전당대회 때 세 사람이 2차 선거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전당대회는 승자인 김대중의 후보 지명 수락 연설에 이어, 패자인 김영삼의 승복 연설 및 김 후보에 대한 지원 약속을 끝으로 별 탈 없이 마무리됐다. 이런 마무리도 야당사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김영삼도 1971년 4월 100만여명이 모였다는 김대중의 장충단공원 유세 때 충남 아산군에서 지원 유세를 벌여 약속을 지켰다. 그는 실력 대 실력의 대결 과정에서 기대했던 ‘선의의 경쟁’ 토착화가 가능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후에도 김영삼은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계속함으로써 1969년 11월8일 치켜든 40대 대망론의 깃발을 내려놓지 않았다.
김대중도 후보로 선출된 직후인 10월16일 가진 첫 번째 기자회견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 분명하고 참신한 정견을 발표했다. 그는 독재 시대를 넘어서 정치 권력에 예속된 사회 모든 부문을 자유화하는 “제2의 해방을 단행”하는 한편, 3선 조항을 폐지하고 중임 조항으로 환원해 헌법의 영예를 회복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김대중은 능률 향상과 공정 분배를 협의할 노사공동위원회 설치, 남북 간 비정치적인 직접 접촉, 한반도 전쟁 억제에 대한 4대국 공동 보장 요구, 군의 정치 중립 확립, 향토예비군제 폐지 등 당시에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거나 상상하지 못했던 비전을 제시했다. 이후에도 김대중은 목숨까지 위협받으면서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고,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한 사이의 긴장 완화, 화해 협력에 노력함으로써 30여년 전 40대 기수론을 제기할 때 내세운 지향을 이어갔다.
이렇듯 40대 기수론은 세대교체를 동반하며 기나긴 반민주의 시대를 버틸 수 있게 했다. 민주화를 진척시키며 민주 세력이 결집할 수 있는 기둥이기도 했다. 그런데 2003년 2월을 끝으로 김대중 정부가 막을 내렸다. 2002년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2000년과 2004년 총선에서 86세대가 대거 국회에 진출했다. 86세대는 민주화운동의 주역이면서 신구 조화 속에서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신(新) 40대 기수론’을 내세웠다. 한편 이들과 다른 보수 성향의 정치집단도 40대 기수론이란 말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언론이 부추기기도 했다. 이번 제21대 대선 때도 그랬다.
그러나 21세기의 40대 기수론은 세대교체를 동반하지도 않았고 대항마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를 제창하거나 대상자로 지목된 사람 가운데 두 김씨처럼 30년은 차치하고 20년을 버틴 사람도 드물었다. 게다가 온전히 자신의 입장을 유지하고 다듬어 온 사람은 더더욱 희귀했다. 심지어 반대되는 입장으로 가거나, 국민과 함께하려 하기보다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6개월의 내란은 그들의 모습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들에게는 통합과 분열의 칼을 내장한 40대 기수론을 제기하는 순간 직면할 온갖 난타를 견뎌낼 만한 맷집과 용기가 없었다. 성역화를 비판하고, 국민과 함께할 수 있는 시대정신을 제시하고 공유하며, 참신한 비전을 구체화하려는 의지와 노력도 부족했다.